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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바둑 고수는 지금도 강할까? 기보에 남겨진 천 년의 실력

옛날 바둑 대국의 수순을 기록한 기보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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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 전의 바둑 고수가 갑자기 현대에 나타난다면 지금의 프로기사와도 대등하게 싸울 수 있을까?

이런 상상을 이야기로 만든 작품이 있다. 바로 만화 《고스트 바둑왕》이다.

작품에는 헤이안 시대의 천재 바둑 기사 후지와라노 사이가 등장한다. 오래전 세상을 떠난 그의 영혼이 현대의 소년 신도 히카루를 만나 다시 바둑을 두기 시작한다. 과거의 고수가 현대 바둑을 접한다는 설정이 이야기의 중요한 축이다.

물론 영혼이 돌아와 바둑을 둔다는 것은 만화 속 이야기다. 하지만 옛날 고수들이 지금의 기사와 대결한다면 어떨지 궁금해지는 건 자연스럽다.

다행히 옛날 바둑 고수들의 실력을 짐작할 방법은 있다. 바로 그들이 실제로 두었던 바둑을 기록한 기보다.

기보를 살펴보면 수백 년 전 고수들이 어떤 수를 선택했고, 어떤 실수를 했으며, 어떻게 승부를 뒤집었는지까지 확인할 수 있다.

기보가 없었다면 옛날 바둑은 사라졌을까?

기보는 바둑판에 돌을 놓은 위치와 순서를 기록한 자료다.

지금은 인터넷으로 프로기사의 대국을 실시간으로 보고, 끝난 대국도 처음부터 다시 재생할 수 있다. 하지만 카메라와 컴퓨터가 없던 시대에는 바둑판 모양의 격자에 돌의 위치와 수순을 표시하는 방식으로 대국을 남겼다.

이 기록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누가 이겼는지 알려주기 때문만은 아니다.

축구 경기의 최종 점수만 보고는 어떤 장면에서 승부가 갈렸는지 알기 어렵다. 바둑도 마찬가지다. 누가 몇 집 차이로 이겼다는 결과보다 어떤 순서로 돌을 놓았는지가 실력을 이해하는 데 훨씬 중요하다.

대표적인 사례가 1846년 일본에서 벌어진 혼인보 슈사쿠와 이노우에 겐난 인세키의 대국이다.

당시 슈사쿠는 열일곱 살의 젊은 기사였고, 상대인 겐난 인세키는 훨씬 오랜 경험을 가진 강자였다. 이 대국에서 슈사쿠가 둔 127번째 수는 지금도 바둑 역사에 남은 유명한 착수다.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그 수를 본 겐난 인세키의 귀가 붉어졌다고 한다. 상대가 뜻밖의 좋은 수를 두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동요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이 수는 ‘귀가 붉어진 묘수’로 알려졌다.

그 수가 유명한 이유는 단순히 상대를 놀라게 했기 때문이 아니다. 바둑판 한가운데에 가까운 곳에 놓인 돌이 여러 방향의 형세에 동시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한쪽의 집을 넓히면서 다른 쪽 돌을 돕고, 상대의 세력까지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기보가 남아 있기에 오늘날에도 그 장면을 다시 놓아 보고 왜 좋은 수였는지 분석할 수 있다.

중국의 오래된 바둑 서적인 《망우청락집(忘憂清樂集)》에도 고전 대국 기록이 전해진다. 약 천 년 전 편찬된 이 책은 옛 바둑을 연구할 때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다만 옛 기록에 등장하는 모든 대국이 실제로 그 시기에 두어진 것인지까지 확실한 것은 아니다. 오래된 기록일수록 전승 과정과 진위 여부를 구분해 살펴봐야 한다.

기보가 없었다면 바둑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았겠지만, 우리는 과거 고수들의 실제 선택을 지금처럼 자세히 살펴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오래된 바둑 서적에 기록된 고전 바둑 기보

옛 기보는 수백 년 전 바둑 고수들이 어떤 수를 두었는지 보여주는 자료다.

천 년 전 바둑 고수들은 어떻게 바둑을 배웠을까?

요즘 바둑을 배우려면 방법이 많다. 인터넷에서 프로기사의 기보를 찾아볼 수 있고, 바둑 강좌나 정석 자료도 쉽게 접할 수 있다. 자신이 둔 바둑을 인공지능으로 분석해 어느 수가 좋았는지 확인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옛날 고수들에게는 이런 환경이 없었다.

스승에게 직접 배우거나 다른 고수와 대국하면서 실력을 쌓았고, 구할 수 있는 기보와 바둑 서적을 공부했다. 지금처럼 세계 각지의 대국을 손쉽게 모아 비교하거나, 인공지능에 수천 가지 변화를 검토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과거의 고수들이 바둑을 단순하게 두었다는 뜻은 아니다.

바둑에서 상대의 돌을 잡으려면 앞으로 어떤 수가 이어질지 여러 단계 앞까지 계산해야 한다. 상대가 예상과 다른 곳에 두면 그에 맞춰 계획도 바꿔야 한다.

이런 능력은 바둑 이론을 많이 아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다.

혼인보 슈사쿠의 유명한 127번째 수를 떠올려 보자. 한곳에 돌을 놓으면서 여러 방향에 미치는 효과를 함께 계산하는 판단은 현대 바둑에서도 중요하다.

당시 기사들이 오늘날의 인공지능 연구 결과를 알지 못했다고 해서 그런 판단 능력까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공부할 수 있는 자료와 연구 방법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현대 기사는 과거 고수들이 남긴 성과까지 배우고 출발하지만, 옛날 고수들은 자기 시대까지 축적된 지식 안에서 새로운 수를 찾아야 했다.

이 차이는 실제 대결에서 중요한 변수가 된다.

옛날 바둑과 현대 바둑은 무엇이 다를까?

바둑판의 기본 모습은 오랫동안 이어져 왔지만, 좋은 수를 판단하는 기준과 대국 방식은 계속 변해 왔다.

가장 이해하기 쉬운 사례가 포석이다. 포석은 대국 초반에 바둑판 전체를 어떻게 차지할지 구상하며 돌을 배치하는 과정이다.

과거에는 좋은 포석이라고 여겨졌던 방식이 오랜 연구 끝에 수정되기도 했다. 특히 인공지능이 등장한 뒤에는 기존의 상식을 다시 검토하는 일이 많아졌다.

대표적인 것이 삼삼침입 이다.

삼삼은 바둑판 구석에서 가로세로 세 번째 줄이 만나는 자리다. 상대가 구석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도 삼삼에 들어가면 그 안에서 집을 만들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예전에는 이런 침입을 너무 이른 시점에 하는 것을 꺼리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인공지능 연구가 확산된 뒤에는 대국 초반부터 삼삼에 들어가는 수법이 적극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옛날 고수가 현대 대국을 본다면 익숙하지 않은 수가 좋은 수로 평가받는 장면에 놀랄 수도 있다.

규칙과 관습의 차이도 있다.

현대 바둑에서는 흑이 먼저 두는 이점을 보정하기 위해 백에게 ‘덤’을 주는 방식이 널리 쓰인다. 반면 슈사쿠가 활동하던 에도 시대 일본 바둑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덤 제도가 적용되지 않았다.

이 차이는 포석에도 영향을 준다. 흑이 먼저 두는 이점을 어느 정도 보정하느냐에 따라 초반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싸워야 하는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더 오래된 중국 바둑에는 대국을 시작할 때 특정 위치에 돌을 미리 놓는 방식도 있었다.

따라서 옛 기보를 보면서 “왜 여기서 이런 수를 뒀지?”라고 생각했다면, 단순히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당시의 규칙과 전략이 달랐을 가능성도 살펴봐야 한다.

바둑의 기본 원리는 이어졌지만, 그 원리를 활용하는 방법은 시대마다 달라진 것이다.

바둑의 기본 원리는 이어져 왔지만 포석과 정석, 연구 방식은 시대에 따라 변화해 왔다

바둑의 기본 원리는 이어져 왔지만 포석과 정석, 연구 방식은 시대에 따라 변화해 왔다.

고스트 바둑왕의 후지와라노 사이는 실제로 존재했을까?

《고스트 바둑왕》의 후지와라노 사이는 헤이안 시대에 살았던 천재 바둑 기사로 등장한다.

하지만 사이는 실존 인물이 아니라 창작 캐릭터다. 헤이안 시대 일본에서 바둑이 귀족 문화의 일부였다는 역사적 배경은 실제와 연결되지만, 사이가 현대의 소년에게 나타나 바둑을 가르친다는 이야기는 허구다.

작품에는 흥미로운 역사적 연결도 있다.

바로 앞에서 살펴본 혼인보 슈사쿠다.

《고스트 바둑왕》에서는 사이의 영혼이 과거 슈사쿠와도 연결되어 있었다는 설정이 등장한다. 실존했던 전설적인 기사의 뛰어난 실력을 만화 속 천재의 이야기와 엮은 것이다.

물론 실제 슈사쿠가 영혼의 도움을 받아 바둑을 두었다는 역사적 근거는 없다.

오히려 이 설정을 알고 나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이 더 흥미로워진다. 과거의 천재가 현대에 나타났을 때, 자신이 알고 있던 바둑을 고집할까? 아니면 새로운 수를 배우며 더 강해질까?

이것은 만화 속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실제 옛 고수의 실력을 비교할 때도 생각해 볼 만한 질문이다.

그렇다면 옛날 바둑 고수는 지금도 강할까?

결론부터 말하면 옛날 고수가 현대에 나타나 곧바로 최정상급 프로기사와 대결한다면 불리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 고수가 현대 바둑을 배운 뒤에도 약할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두 상황을 나눠서 생각해야 한다. 먼저 아무런 준비 없이 대결하는 경우다.

현대 프로기사들은 수백 년 동안 축적된 기보와 정석, 새로운 포석 이론을 배웠다. 여기에 인공지능 연구까지 더해졌다.

옛날 고수는 그런 지식 없이 현대의 낯선 수법에 대응해야 한다. 특히 초반 포석에서부터 자신이 익숙하게 배운 방식과 다른 선택을 마주할 수 있다.

그래서 같은 규칙으로 당장 대결한다면 현대 최정상급 기사가 유리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편이 합리적이다.

하지만 두 번째 상황은 다르다.

옛날 고수에게 현대 바둑을 충분히 배울 시간을 준다면 어떨까?

혼인보 슈사쿠 같은 고수는 이미 자기 시대의 강자들과 경쟁하며 뛰어난 수읽기와 판단력을 보여준 인물이다. 그런 사람이 현대의 연구 결과를 익혔을 때 어느 수준까지 도달할지는 알 수 없다.

물론 현대에 적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곧 지금의 세계 최강자와 대등해진다는 보장은 아니다. 실제로 시험할 수 없는 가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옛날 고수들의 실력을 숫자로 비교할 수 있을까?

이 역시 쉽지 않다. 시대마다 규칙과 연구 환경이 달랐고, 서로 직접 대국한 기록도 없다. 기보를 인공지능으로 분석하면 개별 착수의 정확도를 살펴볼 수는 있지만, 그 결과만으로 시대가 다른 기사들의 전체 실력을 공정하게 순위 매기기는 어렵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과거의 고수들이 남긴 바둑은 단순한 옛날 기록이 아니다. 현대의 우리가 그 수를 다시 놓아 보며 당시의 판단을 이해하고, 때로는 다른 해답을 찾아볼 수 있는 자료다.

1846년 슈사쿠가 놓은 127번째 돌은 오래전에 바둑판에서 치워졌지만, 그 수를 둘러싼 이야기는 지금도 남아 있다.

옛날 고수가 오늘날 얼마나 강할지는 알 수 없어도, 그들이 남긴 좋은 수는 지금도 다시 배울 수 있다.

출처 및 참고자료